청소 안 하는 딸을 둔 이 엄마가 사는 법

부지깽이와윤씨들|2010. 11. 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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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을 다 치우라는 것도 아니고, 손 바닥만 한 네 방 치우는 게 뭐가 어렵니?"
두 달 전까지 제가 입에 달고 살던 말 중의 하나입니다.

사춘기 우리 딸, 여러 가지가 이해 안 되기는 하지만, 자기가 자는 방을 청소하지 않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요.
어지러운 책상 위와, 여분의 공간이 있음에도 보고 난 책을 꽂혀 있는 책 위에 그냥 얹어 놓은 책장, 제일 가관은 책상 밑이 창고 인줄 아는 행태(?).

학교에 가고 난 후에 충격받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고 아이의 방문을 열 때마다, 뒤집어 벗어 놓은 일상복부터 시작해서 굳은 다짐은 1초도 안 돼 무너지곤 했답니다.
도대체 그 속에서 공부하고 잠이 든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한 번 마음먹고 치우면 깨끗하게 치울 능력(?)도 있으면서, 대부분을 그러고 지내고 있었답니다.

어느 순간 제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단계가 됐습니다.
이 엄마가 매일 방 청소해 주는 사람도 아니고, 남자고 여자고 간에 자기 주변은 정리 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매일 청소를 대신 해 주다가는 나중에 사회생활 하면서 자기 책상 정리 하나 못하는 어른으로 자랄 것 같았습니다.

청소도 일종의 습관으로, 자주 해 본 사람 눈에는 치워야 할 게 눈에 보이지만, 해 보지 않으면 그 물건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없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게 됩니다.

굳은 결심으로 두 달 전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제 네 방은 네가 치워. 엄만 손도 안 댈 테니까."

그날 이후로 아침에는 등교하느라 그냥 가고 저녁에 잠자기 전에만, 아이 스스로 청소기만 간단하게 돌리는 상황이 됐습니다.

가끔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 이상의 스트레스는 저도 받기 싫고, 청소 때문에 아이와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것도 피곤했습니다.

두어 달 후,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이 방에서 온갖 썩는 냄새와 벌레들이 기어 나오는 꿈이었지요.

다음 날, 아이가 등교한 후 걸레와 청소기를 들고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마음 단단히 먹고 아이 방의 책장부터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1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내 속은 뜨거운 물에 베이킹파우더 넣은 것처럼 화가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하교하고 집에 오면 어떤 말로 단번에 아이 마음에 상처를 주어 청소를 잘하는 아이로 만들까, 온갖 단어와 문장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점심때도 지나고, 화가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차분해지며 곰곰이 생각하게 되더군요.
내년이면 고등학생이 되는데 학원 한 군데 안 다니고도 공부는 항상 상위권이고, 선생님들이 '보배'라며 모두 예뻐해 주시고, 사춘기라 뻣뻣하기는 해도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안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허락을 받고, 동생에게 툴툴거리긴 해도 벌써 군대 갈 거 걱정하는 누나이고, 엄마 기분 안 좋으면 제과점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빵과 커피 잔뜩 사와 기분 풀어 줄 줄도 알고, 태권도 3단에 운동 신경도 뛰어나고 남들이 다 예쁘다고 하고....

장점이 백만 가지는 되더군요.
단 하나, 청소 하나만 못하는 겁니다.
그 외에 못 하는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딸 고슴도치입니다. ^^)

왜 그동안 나는 딱 한 가지 못하는 것만 보았을까?
청소 안 하는 그 한 가지 뒤로 백만 가지 잘하는 것들이 줄을 일렬로 잘 맞춰서 섰는지, 가려져 보이지가 않았던 거지요.

갑자기 화로 가득찼던 마음에 빛내림이 가득 내렸습니다

우리 딸은, 청소'도' 안하는 딸이 아니라 청소'만' 안 하는 딸이었던겁니다.

그날 이후로 아이가 등교한 후 즐거운 마음으로 걸레와 청소기를 들고 아이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제야 눈에 보입니다.
그래도 잠옷은 벗어서 옷장에 넣어 두고, 하교하면 블라우스는 목욕탕 대야에 물 받아 잘 담그고, 교복도 잘 걸고, 아침에 머리 손질하는 스트레이트기도 불 안 나게 잘 끄고, 나가면서 창문도 잘 열어두었네요.

딸, 그동안 못 하는 것만 봐서 미안하다, 이젠 안 그럴게.
사랑해, 울 알딸딸(딸의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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