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사이 갈라 놓은 학교 설문지

부지깽이와윤씨들|2009. 9. 1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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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인 작은 아이 학교에서 설문지를 보내왔습니다.
아이의 식생활 개선을 위한 설문지였습니다.
엄마가 쓰는 칸에는 아이에게 바라는 식습관을 적게 되어있고, 옆 칸에는 아이의 다짐을 쓰게 되있습니다.

당연히 아이 마음에는 엄마가 좋은 얘기를 써 주길 바랍니다. 
"나 아무거나 잘 먹지?   반찬 투정 안 하잖아.   밥도 안 남기 잖아."
무얼 쓸까 궁리하는 이 엄마 귀에 대고, 마법을 걸 듯이 주문을 외우고 있습니다.
흥!
내가 넘어 갈 줄 알고?
나는 네가 11년 동안 밥 먹을때 가끔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아이 말 처럼 밥을 남긴 다거나, 반찬 없다고 밥을 안 먹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그렇듯이 채소를 잘 안 먹으려고 합니다.
고기 먹을때 몇 장이라도 먹이려고 상추를 따로 주면 몇 장씩 우걱 우걱 먹어 버리고, 고기만 열심히 집어 먹지요.
시금치 반찬도 한 끼에 두 번 이상은 안 집으려고 하고, 김치도 할당 된 양(?)만 겨우 먹습니다.

키 크고 건강하려면 먹어야 한다고 억지로 먹이기도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도 아이와 비슷했기에 가끔은 눈 감아 주기도 합니다.
콩 싫어 하는 큰 아이가 나 몰래 콩 좋아 하는 동생 밥 그릇에 콩을 얹으며 협상하는 것도 어느땐 못 본척 하기도 하구요.

이런 사정을 훤히 아는데, 설문지 앞쪽에 예시로 나와 있는 '우리 아이는 개선할 식습관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골고루 잘 먹고 있습니다.'를 손으로 짚어 가며 그대로 쓰길 눈 빛으로 강요하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썼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이 입장 생각해서 한 가지만 썼지요.

사실 여러 가지를 쓸 수도 없었습니다.   칸이 작았거든요. 칸만 길었어도 줄줄이 쓰는건데..... ㅎ~





다 쓴 후 아이에게 읽어 보고 다짐을 쓰라고 넘겨 주고 잠시 후에 보니 이런....


세상에, 제가 낳은 아이 맞나요?
"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선생님께서 보시고 웃으시면 어떻하냐.   엄마하고 아들하고 싸우는 것 같잖아."
어이가 없어서 이게 뭐냐고 따졌더니
"엄만 맨날 밥 쪼끔 먹어서 말랐잖아."
당해 보라는 듯 말합니다.
그래도 나는 문장 앞에 '사랑하는~'도 붙여주고, 문장 끝에 ^^ 도 그려 주었는데, 아이가 쓴 글은 처음엔 수긍하는 듯 하다가 뒤에 가서 뒤통수 치는 느낌이랄까.....


이거 참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비굴한걸 참고 지워 달라고 하고 싶지만 볼펜으로 썼으니 그도 저도 못하고 그냥 들려 보냈습니다.

아들!!
엄마는 잘 안 먹으면서 너네 한테만 잘 먹으라고고 한 거는 할 말이 없지만, 엄마는 더 클 일이 없잖냐, 그리고 나이 들면서는 마른게 더 좋은거래. (어쩐지 궁색한 느낌이....)


오늘 저녁 밥상을 저 푸른 초원으로 꾸며서 아들에게 소심한 복수를 해 볼까 생각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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