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술 푸게 하는 세상, 엄마는 스토커?

부지깽이와윤씨들|2010. 3. 12. 16:18
반응형


어제저녁 우리 집 전화기에 찍힌 통화 목록입니다.


어제저녁 제 전화기에 찍힌 통화 목록입니다.   (알딸딸은 제 딸아이, 내사랑은 남편, 아드을은 아들입니다.)
사람이 정신이상자 되기 정말 쉽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도 눈 깜짝할 새인 듯합니다.

며칠 전부터 큰아이가 학기 초가 되면 당연히 하는 환경 미화 때문에 목요일에 늦을 거란 얘기를 두세 번인가 했습니다.
전날인 수요일에도 얘기해서 작은 아이도 기억하고 있었지요.

정규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오후 3시쯤 되니까 늦어도 6시 30분 정도면 집에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수업 끝나자 마자 전화를 하기도 하고, 집에 오면서도 전화를 하는 아이가 4시가 넘었는데도 전화 한 통 없었다는게 뒤늦게 생각난 겁니다.

수업시간에는 전화기를 꺼놓기 때문에 끝나는 시간인 3시를 훨씬 넘긴 4시 40분쯤에 제 것으로 전화를 했더니 안 받더군요.
슬슬 불안해하는 엄마를  보더니 작은 아이가
"누나 늦는다고 했잖아, 엄마.   나도 들었어."
합니다.

제 성격이 워낙 소심하고 걱정이 많은 탓에 아무것도 아닌 일도 한 번 마음에 걸리면 불안, 초조해하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괜찮아, 괜찮아.  전화기를 진동으로  해 놓고 겉옷에 넣어 놓고 벗어 놓은 채 일을 하는 걸 거야.   아니면 전화기를 껐나?
스스로 진정하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겨우겨우 지나고 6시가 넘어가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로 뉴스의 맨 앞에 연이어 나오는 사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는 그 일 때문에 아이들 학교 보내기도 싫은데, 어두워지는 저녁에 아이와 통화가 안 되니 불안한 마음은 어떻게 진정이 안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불안에 불안이 더해져 거의 5분마다 아이에게 전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아이에게서 제 전화로 전화가 올까 싶어 집 전화기로 바꿔서 전화 했습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음성 메시지도 남겼습니다.

전화를 계속 하면서, 이러다가 내가 미치는 게 아닐까, 그놈의 중학교는 왜 산 밑에 있는 걸까, 요새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교실을 꾸며야 하는 걸까, 학교에 전화 해 볼까, 아니 학교에 찾아 가 볼까 별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10번이 넘게 불안해하며 전화를 계속 하는 엄마를 보더니 작은 아이까지도 걱정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더디게 갔는지....
아무 일도 못하고 불안해하다가 7시 넘어서, 그것도 벨이 한참을 울리다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 가기 직전에 기적처럼 아이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너무 걱정을 한 탓에 제 목소리가 고함에 가까웠지만, 지옥과 천당이 순식간에 바뀐 듯했습니다.

전화기를 꺼 놓고 일에 열중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엄마에게 전화 하려고 막 켰는데, 엄마 전화가 걸려 온거라네요.

으이구, 내 팔자야.  이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얼른 하고 조심해서 오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고, 동네까지 같이 오는 친구가 있다고 해서 그나마 안심을 하고 전화를 끝냈습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머리도 아프고 온 몸에 기운이 빠져 한 동안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집 전화를 살펴보니, 이건 뭐, 스토커 수준이네요. ㅜㅜ

마음 놓고 아이들을 내보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은 단지 꿈일 뿐인 걸까요?
정말로 엄마, 아빠를 술 푸게 하는 세상입니다.

오래전, 늦게 집에 들어가면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세상을 못 믿는 거다' 하시며 꾸중하시던 아버지가 많이 생각납니다.


ps;  작은 아이 전화기는 아빠의 전화기로 일정 시간마다 위치를 알려 주는 서비스에 가입했습니다.   처음 전화기를 들고 학교에 간 날 학교가 아닌 엉뚱한 장소가 찍혀서 아이가 올 때까지 불안해 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전화기를 꺼놓기 때문에 선생님께 전화해 볼까 어쩔까 불안해 하다가 아이가 오고 나서야 안심을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 엉뚱한 장소가 뜨는 엉터리라는 걸 알게 됐지만, 해지하기도 더 불안해서 그냥 두고 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