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무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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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ㅇㅇ책상위에 작업복이 왜 며칠째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다."
50 다 돼서 낳으신 늦둥이와 단둘이 살고 계시는 엄마가, 잠깐 들른 저를 보자마자 걱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이 벌써 며칠째냐? 일요일 오후에 마른 것 개서 가져다 놓은 건데."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일 겁니다.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오늘도 제시간에 나가긴 나갔는데."
집안에서 오가며 눈에 보이는 동생의 작업복이 걸려, 엄마의 성격상 아마 며칠째 잠도 못 주무시고 걱정을 하신 듯합니다.


이천 호국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보러 가는 날.
곱게 모시옷 입으신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시며 아버지께 가시는 걸까요? 




그런 거 있잖아요.
진실을 알고 싶기는 한데 그 진실이 겁이 나는. 그래서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아마도 엄마는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었나 싶어,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고 혼자 속 앓이를 하신 듯합니다.

"ㅇㅇ가 항상 작업장에 내려가는 게 아니니까, 요 며칠은 입을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지. 아니면 혹시 회사에 여벌로 작업복이 있어 그걸 입었을 수도 있고."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여러 가능성을 이야기해 봅니다.

동생 나이가 적지 않아 지금 회사를 그만둔다면 다시 취직하기도 힘들 것 같고, 회사 문제가 아니라 다른 심각한 일이 있는 건 또 아닌지, 책상 위에 며칠째 놓여 있는 작업복이 80 넘은 엄마의 마음을 참 심란하게도 만들었습니다.
남편보다 자식이 어렵다고 하더니, 착하고 효자인 동생이지만 물어보기가 어렵기도 하셨던가 봅니다.

"엄마, 걱정 하지 마. 출근 시간에 맞춰 오늘도 나간 거잖아. 내가 나중에 통화해 볼게."
"그럼 다행인데...  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저는 얼른 화제를 돌렸습니다.

마침 그날 저녁에 동생에게서 다른 일로 전화가 왔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혹시 내 질문이 동생에게 상처가 될까 봐 지나가듯 물었습니다.
"참, 작업복은 왜 안 가져 간 거야? 회사에 여벌로 있는 거 입는 거니?"
동생이 대답하기 전 몇 초 동안 마음이 조마 조마 합니다.

"어 그거, 바지 두 개가 다 지퍼 부분이 뜯어져서 꿰매려고."
"그으래? (반가웠습니다.) 왜 엄마한테 꿰매 달라고 하지. 엄만 무슨 일 있나 괜히 걱정하고 계신다."
"무슨 걱정?"
"너 회사에 무슨 일 있나 해서지 뭐."
"에이 참 엄마는..  내가 꿰매려고 했지. 엄마 눈 침침하셔서 잘 안 보이잖아. 근데 며칠 바빠서 못 하고 있었어."
"알았어, 내일 아침 일찍 내가 가서 꿰매 놓고 올게."
"그래 줄래? 그럼 고맙지."

전화를 끊고 나니, 동생이 어느새 이렇게 철이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 화장하고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며 엎드려 엉엉 통곡하던 안쓰럽고 여려 보이는 동생이 아니라 늙으신 엄마를 마음으로부터 염려해주는 든든한 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일찌감치 엄마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엄마에게 전해 주며, 뜯어진 작업복과 반짇고리를 챙겨 들고 앉았습니다.
"망할 놈.. 그럼 진작말을 하지."
그러시면서 바지 하나를 가져가시네요.
"엄마, 내가 할게. 엄마 잘 안 보이시잖아."
"됐다. 아직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이불 꿰매는 두꺼운 실이 끼워져 있는 바늘로 바느질을 시작하십니다. 그것도 두 겹으로.
"엄마, 그건 너무 투박하잖아. 나처럼 얇은 실 두 겹으로 해도 안 뜯어져."
"일하다가 뜯어 지면 어떡하냐. 여기는 잘 보이지도 않아. 에미 걱정이 그렇게 되면 장가를 갈 것이지..쯧쯧."
습관처럼 붙이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엄마가 그 말씀 하실까 봐 ㅇㅇ가 말을 더 안 할 걸 수도 있어, 엄마. 걱정 마시고 그냥 내버려둬, 엄마. 갈 때 되면 가겠지."
결혼하지 않는 동생이 유일한 걱정이신 엄마 귀에는 씨알도 안 먹힐 말이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내가 얇은 실로 깔끔하게 꿰맨 바지와 엄마가 튼튼한 무명실로 절대 뜯어지지 않을 것 같이 꿰매 놓은 바지를 얌전히 접어 다시 동생 책상 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엄마의 씽크대에는 항상 동생을 위한 정한수가 담겨 있습니다.
새벽에 눈 뜨시자 마자 첫 수돗물을 받아 놓으신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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